문학 선방일기.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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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스님의 僞善
◦ 正월 一일 신년 정초다. 버렸거나 버림을 받았거나 혈연血緣과 향관鄕關이 망막 깊숙이서 점철되어지는 것은 선객도 인간이기 때문이다 . 누구보다고 비정하기에 누구보다도 다정다감 할 수도 있다.
◦ 오늘은 쉬는 날이다. 뒷방이 만원이다. 여러 고장 출신의 스님들이라 각기 제 고장 특유의 설 차례茶禮와 설빔 등에 관해 얘기들을 나눈다. 평소에도 선객禪客들의 먹는 얘기는 반 이상을 차지한다. 그러다보니 끼리끼리 앉아 있게 마련이다. 남방南方출신은 그들대로. 북방北方출신은 그들대로. 호마의북풍胡馬依北風이요 월조소남지越鳥巢南枝때문이겠다.
◦ 오후에는 윷놀이가 벌어졌다. <감자 구워내기>를 걸고서. 떡국을 잘 먹어 평양감사가 부럽지 않는 위의 사정인데도 구운 감자가 또 다시 식성을 돋우니 상원사 감자 맛은 역시 미식가美食家도 대식가大食家도 거부할 수 없는 특이한 맛이 있나 보다.
◦ 경상도 사투리가 판을 치는 윷놀이가 끝이 나고 구운 감자도 먹었다.
◦ 어둠이 깃드니 무척이나 허전하다. 어제는 세모歲暮여서 허전하다 하겠지만 오늘은 정초인데 웬 일일까. 고독감이 뼈에 사무치도록 절절하다. 세속적인 기분이 아직도 소멸되지않고 잠재되어 있다면서 불쑥 고개를 치민다. 이럴 때마다 유일한 방법은 화두話頭에 충실할 수 밖에. 그래서 선객은 모름지기 고독해야 한다.
◦ [수행자는 모름지기 고독해야 한다. 왜냐하면 자기자신과 싸워야 한다는것 그 자체만도 벅찬 일이기 때문이다]
◦ 고독할 수록 자기 자신에게 충실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언제나 나는 나의 입이 노래하면 나의 귀가 들을 뿐이로다]
◦ 이 얼마나 잔혹할이만큼 절절하게 표현한 고독의 극치인가. 고독속에서 고독을 먹고 고독을 노래하면서도 끝내 고독만은 낳지 않으려는 의지가 바로 선객의 의지이다.
◦ 화두는 거북이 걸음인데 세월은 토끼뜀질이다. 어찌 잠시라도 화두를 놓을 수가 있을까.
◦ 선객은 옹고집과 이기와 독선으로 뭉쳐진 아집(我執)의 응고체라고 흔히들 비방삼아 말한다. 그러나 비방이 아니라 사실이며 또한 실상實相이어야 한다.
[아집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윤회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그렇다면 나(如來)만이 그(衆生)을 제도할 수 있다는 아집我執까지 버려야 할까. 그래서 수보리(須菩提)는 물었다.
◦ [여래는 여래이기를 원하지 않습니까? 원한다면 아상我相에 떨어지고 원하지 않는다면 무엇으로 중생을 건지나이까?]라고.
◦ 아집我執없는 선객은 화두話頭없는 선객과 같다. 견성見性하지 못하고 선객으로 머무는 한 아집은 공고히하고
또 충실해야 한다.
◦ 잠자리에 들었을 때 옆에 누운 지객스님이 조용히 말을 걸어왔다.
◦ [지난해엔 제자리 걸음도 못한 것 같아요. 금년엔 제자리 걸음이나 해야 할텐데 별로 자신이 없군요]
◦ [어려운 일이지요. 평범한 인간들은 시간을 많이 먹을수록 그것으로 인해 점점 빈곤해지고 분발없는 스님들은 절밥을 많이 먹을 수록 그것으로 인해 점점 나태와 위선을 쌓아가게 마련이지요. 나아가지 못할 바에야 제자리 걸음이라도 해야 할텐데.....]
◦ 一월 三일 생식을 하는 스님이 산신각山神閣에서 단식기도에 들어가겠다고 한다. 생식을 시작한지 六개월이 된다고 하는데 몸이 무척 이나 약했다. 상원사에서 처음 만났을 때보다도 더 두드러지게 약해 있다.
◦ 고등학교를 마치고 입산했다는 스님인데 독서량이 지나치게 많아 정돈되지 못한 지식이 포화상태를 지나 과잉상태다. 그래서 두루 깊이 없이 박식博識하다. 극히 내성적이어서 집념이 강하고 몸이 약하니 극히 신경질적이고 여러가지로 博識(?)하기 때문에 오만 하고 위선기僞善氣가 농후하다.
◦ 절밥을 오른손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의 햇수밖에 먹지 않았는데도 도인행세를 하려고하니 구참 선객들에게는 꼴불견이다. 틀림없는 삐에로다. 남과 얘기 할때는 上下나 선후先後 구별없이 가부좌를 한채 눈을 지그시 감고 말을 느릿느릿 짐짓 만들어서 하고 걸음걸이도 느릿느릿 갈지자로 걷는다. 그러다가도 누가 자기 자존심에 난도질을 하면 신경질이 발작하여 총알 같은 말씨로 갖은 제스처를 써 가면서 응수한다. 생식은 공부하기 위해서 하는게 아니라 하나의 상相에 지나지 않는다고 그의 언행이 대변해 주 고 있다.
◦ 지기를 싫어하는 뒷방 조실스님도 이 스님에게는 손을 들고 말았다.
◦ 약간 병적인 그의 언행言行이 대중들로 부터 지탄을 받다가 끝내는 버림을 받았다. 개밥에 도토리격이 된 그가 마지막으로 자기는 아무래도 대중보다 위대하다는 것을 과시해보려고 착상한 것이 바로 단식기도이다.
◦ 그의 건강으로보아 위험천만한 일이다. 이 엄동에는 더구나 안될 일이다.
◦ 점심공양을 마친 나는 처음으로 그 스님과 마주 앉았다.
◦ [스님, 단식기도를 하신다면서요? 이 엄동에 냉기 감도는 산신각에서....]
◦ [예, 모두가 따뜻한 방안에서 시주밥이나 얻어먹고 망상만 피우면서 시비만 일삼으니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어서입니다]
◦ 기가 콱 막힌다. 그러나 시비할 계제는 못된다. 그와 나는 여러가지로 많은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 [그래서 스님이 우매한 대중의 업장을 도맡아서 녹여볼까 하는군요]
◦ [고마운 생각이요. 하지만 스님, 장자경莊子經을 독파했다니 한전지보(한戰之步)를 기억하시지요? 연燕나라 소년이 조趙나라 도성인 한단에 가서 趙나라 걸음걸이를 배우려다가 조나라 걸음걸이를 배우기 전에 자기나라 걸음걸이까지 잊고 필경 네발로 기어 자기 고국 으로 돌아갔다는 고사故事말이외다]
◦ 나는 서서히 그의 허虛를 찔러 상相을 벗겨보기로 했다.
◦ [서시빈목을 기억하시지요? 미인 서시美人 西施가 병심病心때문에 눈살을 찌푸리고 마을을 지나가는것이 예뻐 보이자 그 마을 추부醜婦도 흉내로 눈살을 찌푸리고 다니니 부자는 폐문한채 외출을 금하고 빈자는 처자를 이끌고 그 마을을 떠나갔다는 고사말이외다]
◦ [스님, 누워서 한시간 취하는 수면은 앉아서 취하는 세시간의 수면보다 승勝하고, 서서 취하는 다섯시간의 수면보다 수승殊勝할 것입 니다. 자성自性을 무시하고 인간의 작위에 성명性命을 맡기는 자는 언제나 허위에 사로잡히기 마련이요, 구도자를 표방하고 고행을 한다면 양생養生을 외면하는 행위는 종교적 의식으로 재계齊戒는 될지언정 심적 재계는 되지 못할 것입니다. 고행苦行은 끝내 자기학대가 아니라 자기위주가 아닐까요]
◦ [무서운 양도논법兩刀論法이군요. 마치 문턱에서 두 발을 벌리고 入이냐 出이냐를 묻는 것과 같군요]
◦ [논리적인 是와 非를 떠나 시비를 가려 보자는 거요]
◦ [그럼 질문에 대한 답변을 드리지요. 고행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학대임에 틀림없습니다. 자기학대는 자기 훼손으로 바꾸어 말할 수 있습니다. 노자老子도 언급했습니다. "위도爲道함에 일손日損이니 손지損之 우손지又損之하여 이지어무위以至於無爲하면 이무위이무불위의以無爲而無不爲矣라"라고. 損에 損이 거듭하여 손함이 없을때 비로소 득도得道할 수 있음을 말하는게 아니겠어요. 자기위주自己爲主면 타인他人은 벌서 안목 밖이 아니겠어 요]
◦ [타인을 무시한 자기위주야말로 진실한 고행이 아닐까요?]
◦ [개연적 판단을 떠나 단도직입적으로 결론하시지요. 개연성은 회색적인데 회색적인 것은 언제나 기회와 위선을 노릴 뿐이니까요 ]
◦ [스님, 그럼 간단히 묻겠소. 스님은 지금 "日損"을 거듭하면서 고행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느끼고 있습니까?]
◦ [그렇습니다. 나는 고행을 생각하기도 하고 느끼기도 합니다. 어떻게 하면 철저하게 고행을 할까 하고 수단과 방법을 강구하고, 오늘처럼 단식기도를 결심하고 매식每食을 생식으로 대할 때마다 고행을 절실히 체감하고 있습니다]
◦ [스님, 스님의 고행은 벌서 고행이 아닙니다. 노자老子는 실제로 고행을 하지 않고 다만 노자의 지혜로 고행을 유추類推하고 그런 말을 했을뿐이요. 그러니까 스님의 고행은 고행을 체득은 커녕 체감도 못한 노자의 道를 위해 던진 무의미한 희생에 불과합니다. 본래 고행이란 것은 고행을 생각한다거나 느낀다면 이미 고행은 아닐 것입니다. 고행이란 것을 전혀 잊고 무의식적으로 고행하게 되어야 참된 고행일 뿐입니다]
◦ [그렇다면 육체를 오롯이 하고서 고행이 가능하겠습니까?]
◦ [신외身外에 무물無物이며 아생연후我生然後에 만사재기중萬事在其中이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얼핏 듣고 생각하면 극히 유물적이고 유아독존적인 것같지만 자세히 음미해보면 존재의 보편타당성을 표현한 극치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무한한 공간空間, 무량한 원소元素, 무진한 시간, 무궁한 활력活力 (에너지)의 부단한 작용에 의해 생멸生滅하는 무수한 존재중의 하나인 나를 의식했을때 비로소 나는 나를 찾아보게 됩니다. 나를 찾 는 동안 나는 양생해야 하며 양생하기 위해선 수신修身해야합니다. 이렇게 하여 나를 찾았을 때는 이미 나는 없고 다만 적멸이 있을 뿐 입니다. 그런데도 엄동에 병약한 스님이 단식기도를 해야 하겠어요?]
◦ [그런데 그 적멸이라는게 뭔가요? 우리를 이 산속에까지 유혹해 온 그 적멸이라는 것 말입니다]
◦ [나는 적멸을 모릅니다. 그러나 적멸은 문자로서 표현할 수 없으며 적멸을 말하면 벌써 적멸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적멸을 말함은 마치 장님들이 코끼리를 만지면서 지껄였다는 만화萬話에 지나지 않습니다. 다만 성성惺惺히 오득悟得해야 할 뿐입니다. 적멸이니 피안이니 하는 사치스러운 용어를 쓰는 것은 나의 노파심 때문입니다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처음부터 끝까지 어휘로서 빌려 쓴것 뿐입니다]
◦ [그래도 저는 단식기도를 강행하렵니다. 저는 스님이 아니니까요]
◦ 정말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로서는 역부족이다. 道人이 아닌 바에야 누가 선객의 고집을 꺾을 수 있으랴.
◦ 돌아앉으면서 고소를 금치 못할 언어의 유희와 시간을 생식하는 스님과 내가 가졌다는 것은 나의 미망迷妄때문이었을까.
◦ 그러나 생식하는 스님은 사흘을 넘기지 못하고 바랑을 걸머진채 떠나고 말았다. 문자 그대로 작심삼일作心三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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