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교황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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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al styles of Po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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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oken style Your Holiness
Religious style Holy Father
Posthumous style NA
다마소 1세(재위 366~384년)
자신의 독특한 매력을 여인들을 사로잡는 데 활용하는 바람에
간통 혐의로 기소되는 망신을 겪었다.
그레고리오 1세(재위 590~604년)
레오 1세와 함께 마그누스(大) 칭호를 받은 교황
역사, 문학, 음악에 걸쳐 해박한 인문적 지식과 열정으로
《설교집》, 《사목자 규범서》 등 여러 권의 저서와 유명한 성가 <그레고리안 찬트>를 지었다.
스테파노 (2세)(재위 752년)
나흘 만에 뇌출혈로 사망해서 그를 교황 인명록에 넣는 것은 아직도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이로 인해 이후의 교황명 스테파노는 3세(2세), 4세(3세)식으로 붙여진다.
요한 12세(재위 955~964년)
원래 방탕한 성정을 지녔는데, 교황이 된 뒤에도 호색을 일삼아
교황청이 매음굴로 불릴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27세에 정사를 벌이던 중에 사망했다.
그레고리오 6세(재위 1045-1046년)
스스로 교황직을 양도했다. 이 과정에서 돈이 오고갔다고 전한다.
요한 21세(재위 1276~1277년)
연구 도중 서재 천장이 무너져내려 사망했다.
니콜라오 4세(재위 1288~1292년)
한여름에 여러 추기경이 죽어나간 뒤 중단된 선거 회의장에 불을 때 병균을 없애는 등
선행을 한 추기경으로 두 차례나 교황에 당선되었으나 고사하다 결국 교황에 즉위했다.
레오 10세(재위 1513~1521년)
예술의 열렬한 후원자였던 그는 교황에 선출되자
“하느님이 나에게 교황직을 주셨다. 그러니 마음껏 즐기자”라고 했다 한다.
우르바노 8세(재위 1623~1644년)
당대의 가장 유명한 점성가를 데려다가 교황궁에서 거대한 마법 의식을 거행했다.
비오 8세(재위 1829~1830년)
“명예가 사람을 바꾼다”는 속담이 틀림을 입증하는 사람이라 평가받는다.
왜냐하면 그는 교황이 된 뒤에도 추기경 시절 좋아했던 포도주를 마시기 위해
날마다 주막을 찾아갔기 때문이라 한다.
요한 바오로 1세(재위 1978년)
처음으로 두 개의 교황명을 택하고 겸손의 표시로 대관(戴冠)을 거절함으로써
관례를 깨뜨려 주목을 받았으나 재위 3주 만에 서거했다.
요한 바오로 2세(재위 1978~2005년)
456년 만에 선출된 비이탈리아인 교황이자, 최초의 폴란드인 노동자, 학자 출신 교황이다.
현대 교황으로는 드물게 라틴어와 다양한 외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다.
※ red is support for Avignon, blue for Rome
교황사에는 여성들도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허구의 인물이지만 ‘여교황 요안나’(111쪽)도 교황사의 한 장을 차지하면서 전승되어 오고
있다. 그레고리오 11세와 우르바노 6세에게 조언을 해주고 큰 영향력을 미친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 뛰어난 미모 덕에 알렉산데르 6세의 연인이 되었던 줄리아 프라네세 등이 있다.
현대로 와서는 비오 12세의 가사를 돌보았던 파스콸리나 수녀가 있었고, 요한 바오로 2세는
즉위하자마자 동정녀 마리아의 첫글자인 ‘M’을 교황 문장(紋章)에 포함시킴으로써 성모
마리아에 대한 추앙을 분명히 했다.
2천 년간 수많은 교황이 있었기에 그에 관해 통계를 내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다.
역사상 264명의 교황과 39명의 대립교황이 있었고,
그 가운데 78명의 교황과 2명의 대립교황이 성인으로 추증되었고,
8명의 교황이 시복(복자로 추증)되었다.
출신지별로는, 이탈리아 출신이 177명으로 가장 많고,
프랑스 14명, 그리스 11명,
독일 2명, 아프리카 2명, 스페인 2명,
영국 1명, 폴란드 1명..... 등이다.
직분상으로는 수사 출신이 22명, 탁발 수도사 출신이 16명,
평신도가 2명, 은둔자가 1명..... 순이다.
또한 4명이 사퇴하고 5명이 투옥되었고,
4명이 살해, 1명이 암살, 1명은 면직되었고, 1명은 대중들에게 몰매맞아 죽었다.
그리고 앞서 말한대로 천장이 무너지는 바람에 죽은 교황도 있었다.
교황이 귀양살이를 했던 프랑스 아비뇽의 교황궁.

선거를 통해 선출된 교황에 맞서 정당한 권위 없이
교황직을 주장하거나 수행한 사람을 일컬어 ‘대립교황’이라고 한다
세 명의 교황이 공존했던 기가 막힌 사건은
교황이 프랑스 아비뇽에서 귀양살이를 해야 했던 이른바
아비뇽 유수기(幽囚期ㆍ1309~1377)가 끝난 직후에 일어났다.
1378년 교황 그레고리오 11세가 로마로 귀환함으로써
아비뇽 유배가 끝이 났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출신 추기경들로 구성된 당파는
여전히 존속했고, 그 결과 아비뇽은 교회 분열의 뿌리로 작용했다.
가톨릭 교회는 로마의 교황과 아비뇽의 교황, 두 교황을 동시에 모시는
분열상태에 빠져들었다. 교회 분열을 종식시키기 위해 로마와 아비뇽, 두 교황 측의
추기경단은 파리에서 기존의 두 교황을 폐위하고 새로운 교황(알렉산데르 5세)을 선출하여
교회의 일치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기존의 두 교황이 불복하고 계속 교황 행세를 하는 바람에 두 명의 교황이 대립하던
상황에서 또 한 명의 교황이 대립하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이 사태는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세 명의 교황을 모두 자진 사퇴시키고
새 교황을 뽑음으로써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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