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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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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성경은진실 이름으로 검색
댓글 2건 조회 5,681회 작성일 11-11-07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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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부자청년이 예수님께 달려왔다. 그는 예수님 앞에 꿇어 앉아 다음과 같이 물었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永生)을 얻으리이까?”(막 10:17). 예수님은 그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막 10:21).

 

1. 부자가 가난한 자를 위하여 할 수 있는 선

 

만일 예수님이 “가난한 자를 생각하라”는 의미로 말씀하셨다면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부자가 가난한 자를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은 조금 보조하여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부자는 그렇게 하는 것이 약간의 부담이 될 수 있는 정도이다. 그러나 기본적인 문제로 허덕이는 가난한 자에게는 그것이 큰 도움과 배려가 될 수 있다. 이것이 부자가 가난한 자를 도와주는 것이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를 도와주는 문제를 위하여 다음과 같이 권고 하고 있다.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밭 모퉁이까지 다 베지 말며 떨어진 것을 줍지 말고 그것을 가난한 자와 거류민을 위하여 남겨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레 23:22). “네가 네 포도원의 포도를 딴 후에 그 남은 것을 다시 따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신 24:21).

 

2.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는 것에 대한 목적

 

부자가 자신의 재산을 완전히 바닥까지 내면서 가난한 자에게 주는 것은 가난한 자를 도와주는 선을 넘는 내용에 해당한다. 그런 내용은 자기 희생이며 헌신에 가까운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부자 자신은 생각지도 않는 것을 하나님처럼 우러러 보이는 다른 존재가 그런 것을 지시하는 것은 부자의 입장에서는 그런 행위가 자기 희생이나 헌신을 하는 것도 될 수가 없다. 그것은 한낱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는 지시에 불과한 것이다.

 

부자가 설령 예수님의 말씀대로 실행했다고 가정하더라도 그것은 가난한 자를 사랑했다는 측면에서 이루어진 것도 아니고, 자기 희생이나 헌신을 한 것도 아니다. 자기 희생이나 헌신에는 반드시 자발성이 있어야 한다. 부자가 예수님의 말씀대로 실행했다면 그것은 단지 자신이 영생을 얻겠다는 수단으로서 예수님의 말씀을 실행한 것이 되고 만다. 그리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영생을 소망하는 그에게 있어서 영생을 얻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위협감이 들어서 마지못하여 행하게 되는 것이 될 가능성이 높다.

 

부자는 예수님을 존경한다는 표시로 예수님 앞에서 꿇어앉아 묻고 있을 정도이었다. 상대가 진정으로 높이 보이게 되면 상대의 말씀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위력이 발생된다.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쌔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막 10:17).

 

예수님께서 부자에게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고 말씀하신 것은 가난한 자를 위하라는 의미도 아니고, 너는 자발적으로 다른 이를 위하여 희생이나 헌신을 하여야 한다는 의미도 아니다. 그것은 단지 반강제적인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는 말씀일 뿐이었다.

 

그 수단의 목적은 부귀라는 것에 의지하고 있는 우상을 부자 청년의 마음속에서 헐어버리는데 있었다. 즉 예수님은 영생을 얻는 문제에 있어서 부귀와 빈궁 그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그 사람의 마음 상태만이 문제가 되고 있었다.

 

영생은 피조물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 상황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인데 피조물이 절대자이신 하나님을 절대시 보지 못하고 다른 것들을 절대시하고 있다면 그 절대시하고 있는 것을 먼저 깡그리 제거하여 버리는 것이 필요한 것이었다. 그런 의미로 하신 것이 부자에게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마치 부모가 자식을 보니까 자식이 장난감들에만 온통 중요성을 가지고 있고 부모 자신은 장난감들이나 많이 사다주는 존재로 여기며 부모를 높일 줄도 모르고 부모의 가치를 인정도 하지 않고 있으면 그런 문제를 교육시키기 위하여 그 자식에게 “네 장난감들을 모두 없애버려야겠다. 가서 네가 가지고 있는 모든 장난감들을 장난감들이 없는 가난한 네 친구들에게 모두 나누어주고 와라”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 이제는 장난감과 사는 자식이 아니라 부모와 사는 자식으로 변화시키고자 부모는 노력할 것이다. 어느 듯 자식의 마음 속에 부모를 귀중히 볼 수 있는 마음이 형성된 것을 보게 되면 부모는 기분 좋게 자식에게 다시 장난감들을 사다가 줄 것이다. 전보다 더욱 좋고 최신형 장난감들을 자식은 받게 될 수도 있다.

 

만일 자식이 평소에 장난감들보다 부모를 귀중히 여기고 장난감들은 부수적인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면 부모는 굳이 그 자식에게 “장난감들을 다른 아이들에게 모두 갖다 주라”고 호되게 말씀하지 않을 것이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비싼 자전거를 사다가 주었는데 그 자식이 그것을 조금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른 가난한 친구에게 주었다면 좋아할 부모가 어디에 있겠는가? 부모는 오히려 속상해할 것이다.

 

부자가 가난한 자에게 주는 것은 부자가 많은 장난감들 중에서 실컷 쓰고 이제는 실증이 난 것들 중에서 버리기에는 아깝고 꽤 쓸만한 것을 주는 수준이다. 부자가 가난한 자에게 주는 것은 자신이 소중히 아끼는 것을 주는 것이 아니다. 물론 선물로 주는 것은 자신의 소중한 것을 줄 수 있다. 그러나 가난한 자에게 준다는 것은 선물을 준다는 의미가 아니다. 부자가 가난한 자에게 주는 것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물을 모두 팔아서 돈으로 만들어 가난한 자에게 몽땅 주는 것이 아니다. 부자가 가난한 자에게 주는 것은 부자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들 중에서 조금 생각하여 주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가져오지 말고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리라”(신 24:19).

 

예수님께서 부자 청년에게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고 말씀하신 것은 소유적인 것으로 가치관을 형성하고 있는 그에게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그런 가치관으로는 되지 않고, 존재적인 가치관을 형성하고 있어야 된다는 목적에서 그런 말씀하셨다고 보아야 한다.

 

자식이 장난감들을 가지고 행복하게 지내고 있는데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가 그것을 싫어할 부모가 어디에 있겠는가? 하나님은 당신이 부유하게 사는 것을 싫어하지 않는다. 문제는 부모를 생각지도 않고 부모보다 장난감을 더욱 귀중하게 생각하고 있는 자녀에게는 부모를 생각하게 하는 수단으로서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고 말씀하실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 말씀은 명령에 가까운 강제 사항이다. 부모의 권위로서 자식에게 하는 수준에 해당한다. 아무나 그런 명령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상대에 대하여 분명하게 책임을 질 수 있는 자만이 그런 명령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영생을 얻고자 하는 부자 청년에게 그런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너는 존재적인 문제를 생각할 줄 알아야 영생을 얻게 되는 첫 걸음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소유적인 문제에만 매어있어서는 영생을 얻는 문제의 자물통도 열 수가 없다”는 것이다.

 

사람이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것은 하나님과 나 사이에 존재적인 문제가 해결되게 한다. 사람이 직장생활은 하는 것은 소유의 문제가 해결되게 한다. 소유문제만 잘 한다고 해서 존재의 문제, 곧 영생을 얻는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음악가가 음악을 잘 한다고 그에게 영생의 문제가 해결되겠는가? 건축가가 건물을 잘 만들면 그에게 영생의 문제가 해결되겠는가? 정치가가 정치를 잘하면 그에게 영생의 문제가 해결되겠는가?

 

아니다.

 

영생의 길은 따로 있는데 사람은 그 길은 찾지 않고 자신의 전문분야가 잘 되는 문제만 찾고 그 분야가 잘 되지 않으면 자살까지 하고 있다. 이런 마인드로는 영생에 이루지 않는다는 것이 부자에게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라는 표현으로 나타나고 있다. 즉 영생의 문제는 네 전문분야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것으로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영생의 문제는 피조물이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야 되는 것인데 부자청년은 재물을 만나는 일에만 온통 신경을 쓰고 있었다. 예수님은 그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3. 병세를 진단하여 처방하여주셨던 예수님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왔을 때에 예수님은 그의 마음 중심의 상태가 어떠하다는 것을 미리 알고 계셨다. 그가 어떤 병에 걸려있는 존재이라는 것을 의사가 병자를 진단하는 것보다도 더욱 정확하게 이미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부귀를 그대로 가지고도 영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존재이었더라면 예수님은 굳이 그에게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라는 대수술과 같은 처방을 내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 부자 청년에게는 이 말씀이 그에게 영생을 얻게 되도록 인도할 수 있는 특효약이었다. 예수님은 그의 부귀를 빼앗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다.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계셔야 될 자리에 부귀가 하나님처럼 높은 존재로 군림하고 있으니 먼저 부귀의 우상을 제거하고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귀중하게 여기는 마음을 정립시킨 다음에, 부귀를 다시 회복시켜주고자 하셨을 것이다. 즉 하나님을 생명처럼 절대시 볼 수 있는 터전에서 부귀를 걸쳐지는 옷처럼 잠시 소유물적인 가치의 것으로 취급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드시기 위하여 그러한 처방을 하셨다는 것이다.

 

소유물을 절대적인 가치로 여기고 존재의 문제는 정작 부수적인 것으로 취급하고 있는 존재에게 영생의 문제는 해결될 수가 없었다. 예수님은 영생을 얻고자 달려왔던 부자에게 먼저 그 마음속을 대수술하기 위하여 말씀하셨다.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4. 사람이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길

 

부자가 만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다고 가정을 하여 보자. 그러면 그런 행위를 하는 동안에 그의 심령의 상태는 부귀보다 더욱 가치있고 귀중한 것을 발견하게 되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그것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막 10:21). 그동안은 땅의 보화만을 찾아서 소유하고자 노력하였던 부자청년이 가난한 자들의 생명을 살리고자 자신이 귀중히 여겼던 재물을 나누어주는 행위를 하는 동안 그의 내부에서는 하늘에서 주는 보화가 내려와서 새로운 시야를 부자청년은 얻게 되었을 것이다.

 

하늘의 보화를 얻어서 소유의 문제보다 존재의 문제를 더욱 가치 있게 여겨진 그의 마음은 존재의 문제에 해당하는 영생을 얻을 수 있는 마음 상태가 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사람이 영생을 얻으려면 그 마음이 영생을 얻을 수 있는 마음의 상태에 있어야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의 공생애 첫 번째의 부르짖음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이었다.

 

만일 사람이 죄악을 사랑하고 죄악에서 떠나지 않고 있으면 그 마음은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다고 볼 수 없다. 예수님은 부자청년에게 재물로 만족하는 수준을 넘어서 하나님을 더욱 귀중히 여기는 마음 자세가 되어야 하나님으로부터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수준이 된다는 것을 들려주셨다. 영생은 인간이 스스로 아무리 노력하여도 만들 수 없는 것이며 하나님이 주셔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부자청년이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한 마음상태가 된 다음에 그가 반드시 하여야 하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그의 구주이며 왕으로 모셔야 하는 일이었다. 예수님은 그 사실을 부자청년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막 10:21).

 

성경은 사람이 영생을 얻는 문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들려준다.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요 5:39).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요 5:40).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요일 5:11).

 

성경은 사람이 영생을 얻는 길의 필수조건은 예수님 안에 있는 것이라고 들려준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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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답게님의 댓글

no_profile 사람답게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ㅋㅋㅋ... 이런 헛소리가 있나...

그 가난한 사람들은 누가 만들었수..???

스바냐 3 :12
내가 가난하고 곤고한 백성들을 너의 중에 남겨두리니...

사무엘상 2:7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이렇게 제 잘난척 하느라 가난한 사람을 만들었다고 하고는,
기껏 한다는 말이 가난한 사람을 도우라는 말 몇마디 하는 허울뿐이네...ㅋㅋㅋ

거기다, 예수는 한 술 더 떠서,

마태복음 26:11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가난한 넘들은 항상 있는것이니, 우선 자기 자신만을 위하라고 하고 있구만...emoticon_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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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브님의 댓글

no_profile 그레이브 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그래서 니네 예수 구라 쟁이들은 헌금 삥 뜯어서 고작 4%도 어려운 이웃 돕는데 쓰질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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